주와함께/하루 한 장 성경읽기

하루 한 장 성경읽기_창세기 43장

jujumomy 2022. 7. 6.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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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가 된 유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사실 요셉을 애굽에 팔자고 말한 사람이에요. 르우벤이 요셉을 구하려다 잠시 나갔다 온 사이 유다와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버렸죠. 죽이자는 형제들을 설득해 죽이지 말자고 하고 대신 팔아버리자 했더니 형제들이 그의 말을 들었던 거죠(창 37:26-27) 

그랬던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신을 담보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같은 아들인데 베냐민을 위해 넷째 아들을 담보로 삼는다니 현재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유다는 이 책임을 지기 위해 나중에 베냐민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창 44)

어찌 되었든 유다가 야곱에게 자신을 담보로 삼겠다고 말을 하고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요셉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두려움에 벌벌 떨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이상한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음식을 사는 곳에서 요셉의 개인 집이라니요 게다가 지난번에 곡식 값으로 낸 돈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누군가 다시 수레에 넣었는지 아니면 정신이 없어서 곡식을 싣다가 실수로 수레에 돈자루도 실었는지 판단도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시므온이 결박당하고 쫓겨나듯 곡식을 갖고 나오느라... 창 42:24) 

 

이 무서운 일에 유다가 나서지 않았으면 이스라엘의 가족들은 굶어 죽을 판국이었습니다. 물론 광야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마치 에돔처럼 버티면 버틸 수 있었겠지만 그 세가 많이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종들과 가축들이 많이 축이나 버려서 족속이라기엔 너무나 부족한 모습으로 변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보면 애굽의 총리가 요셉 인지도 몰랐고, 곡식의 값이 되돌아와있었으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시므온의 안위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오늘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9절)'라고 말할 때는 이 모든 일들 속에서 베냐민만큼은 안전하게 돌려보내겠다 한 것입니다. 

실제로 10명의 아들이 있는 베냐민은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평균수명으로 볼 때 청년 즈음되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30살에 총리가 된 요셉이 7년~ 10년 즈음되었을 테니 베냐민 역시 30대 초반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 큰 성인이라는 거죠. 이런 동생을 위해 담보가 되겠다 나선다는 것은 유다의 큰 결단이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구하고 가난을 이겨내려는 넷째 아들 유다. 이 유다의 자손들은 결국 왕의 족속이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희생이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왜 나만 희생해야 돼?"가 싸움의 주제입니다.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는 것은 잘 되면 본전, 잘못되면 손해일뿐입니다. 물론 고귀한 희생은 칭송을 받기도 하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희생은 언제나 잘되면 본전이거나 잘되도 잊히기 마련입니다. 

유다의 희생의 결단이 본인의 자식들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유다의 결단 덕분에 이스라엘 가족들은 기근을 면하고 살 길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묵상하면서도 선뜻 희생은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니 나도 희생으로 남을 돕자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도덕교과서 적인 이야기 말고 누군가의 희생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교훈으로 기록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유다는 야곱의 유언, 축복을 통해 기억되어졌으며 하나님이 그 족속을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억지로 한 희생이 있나요? 저는 착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환경이 어쩔 수 없어서 희생을 강요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거 아니냐 라고 되묻는 저의 희생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길 기도합니다. 유다처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나의 희생을 값지게 빛내주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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