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피성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4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얼마전 짤막한 영상에서 응급의학과 교수가 생각보다 칼에 찔리는 경우도 많다고 이야기 하는 걸 봤다.
설거지 중에 칼을 씻고 물을 털다가 칼이 날아가 허벅지에 박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떨어지는 칼을 다른 물건을 받듯이 발을 갖다대어 발등에 칼이 꽂히기도 한다고 한다.
사람은 모두가 조심을 한다고 하지만 살다보면 알 수 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과학이 발달한 첨단시대에 모든 것을 관측하고 예견하며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인생사가 늘 예상치 못한 일의 발생으로 때론 힘겹기도 때론 즐겁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서는 생각지도 못하게 심지어 살인을 한 사람이 나온다.
바로 "과실치사"이다. 백과사전에는 주의의무를 위반하여 실수로 사람을 사망하게 한 행동을 일컫는다.
불, 물, 전기, 건축자재물 등 자연물은 물론이고 기술의 발전으로 버튼 하나로도 사람을 사망케 할 수 있는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악의 없이 본인의 일에 열중한 탓에 생긴 사고의 책임을 어느정도 덜어주기 위해 도피성을 만드셨다.
오해할 수 있는 것이 도피성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도피성에서 나올 수 없으며 나오는 즉시 유족이 그를 처단하여도 죄가 아니었기에 대제사장이 바뀔 때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했다. (민35:26-27)
주의의무에 대한 책임은 남아있는 것이었다.
오로지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9 또 너희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의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이 살인죄를 적용받지 않으므로 살인죄와 마찬가지로 심판한다면 심판자의 행위가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들이 도피할 성 6개를 만들라고 명령하신다.
도피성을 통해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용서는 무엇일까 어릴적부터 궁금했었다.
"미안해, 괜찮아"로만 배웠던 용서는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오늘 도피성을 묵상하면서 용서란 마음 한 군데 봉인 해 놓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꽁꽁 봉인해 둔 것을 실수로 내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건드리면 용서할 수 없지만 굳이 안 건드면 나 역시 스스로 그것을 꺼내 상처 입힌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용서가 아닐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대제사장이 바뀔 만큼 지났을 때 봉인된 상처도 잊혀질 것이다.
11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12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13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물론 일부러 미워하는 마음으로 죽이려고 한다면 그는 응당 벌을 받아 죽어야 한다.
여전히 분노로 사람을 죽인 사건 사고가 뉴스에 종종 등장한다.
세상이 더욱 험악해져서 이제는 미움도 없이 그냥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진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내가 죽임을 당하는 피해자가 될까 염려하지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늘 묵상해야 하는 것은 미움이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처럼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 욕설)라 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 5:22)
참된 그리스도인이 욕을 하면 안되고 미움을 오래 품고 있으면 안되는 이유이다.
진짜 살인 뿐 아니라 마음의 살인 역시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이 정해주신 경계
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 그것은 그 사람의 경계였다.
70년이 지나 희년이 되면 매매했던 땅도 원래 하나님이 정하신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율법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온 땅에 널리 퍼지길 원하셨던 것 같다.
때문에 이웃의 땅을 탐내지 말고 다른 민족의 땅을 정복하며 지경을 넓히도록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3. 두 사람 이상의 증인
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16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17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21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모함을 받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 있을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떠올랐다
마태복음 26: 59 - 61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공회가 있을 때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인과 증거를 열심히 찾던 그들이다.
CCTV도 없고 동영상 촬영도 불가능 하던 시절 사람의 입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증거도 물증도 없을 때는 두 세사람의 입으로 증언하는 것이 지금의 CCTV나 블랙박스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서 조사할 때 판명이 나야한다.
하지만 사람의 악독함으로 인하여 대제사장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 증인을 찾는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도 없는 모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모함을 하거나 위증을 하는 일은 많지 않아졌다 .
개인도 카톡이나 녹음기능 등으로 친구 간의 약속이나 잘못도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모함이 불가능해졌다고 하나님 앞에서 거짓 증거를 찾던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더 교묘해졌고, 보다 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오늘 다른 이를 미워하지 않도록 내 마음의 칼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나의 경계 속에서 풍성함을 누리게 하옵소서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호하시며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늘 인식하게 하옵소서